역사·인물 이야기

[책리뷰] 백성을 위한 정치, 하늘을 감동시키는 지도자 '세종처럼'

차라의 숲 2010. 12. 12. 18:31

그제와 어제 여주에 다녀왔습니다. 4대강 공사로 파헤쳐진 남한강은 맨살을 드러내고서도 유유히 흐르고 있었습니다. 겨울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강물이 어쩐지 더 시리게 다가왔습니다. 인간의 탐욕이 여기저기 헤집어놓는 통에 분명 신음하고 있으련만, 물길은 그저 말없이 제 갈길을 가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서늘하게 스산해진 마음을 안고, 영릉에 들렀습니다. 세종대왕과 소헌왕후께서 잠들어 계신 곳입니다.

 

잔디는 단정하니 잘 다듬어져 있었지만, 어쩐지 쓸쓸해보였습니다. 참배의 예를 올리며, 저도 모르게 간절히 기원했습니다. "세종대왕님, 부디 우리 민족이 평화롭게 통일을 이루고, 누구나 골고루 잘 사는 사회가 될 수 있게 굽어살펴주세요." 그리곤 할까말까 망설이다가 한 말씀 덧붙였습니다. "제발 세종대왕님 같은 지도자 한 분 보내주세요"...속말이었지만, 말해놓고도 왠지 머쓱했습니다. "너무 큰 욕심이겠죠?"...세종대왕님 같은 분을 다시 우리 민족의 지도자로 만난다는 건, 정말 너무 큰 욕심일 겁니다.

 

 

 

 

<사진 출처: 세종대왕 영릉 http://j.mp/dOVuXB>

 

 

오늘은 여러분께 세종대왕님에 관한 좋은 책을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박현모(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국가경영 연구실장)의 '세종처럼'입니다. 이 책도 세종대왕의 리더쉽을 세종실록을 비롯한 방대한 사료에 근거해 철저히 집중 조명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 지도자다운 지도자가 없다는 인식 때문인지, 한때 CEO열풍이 불어서였는지, 지난 번 정조대왕도 그렇고, 이 책도 세종대왕의 리더쉽이 주요 테마였습니다. 책이 두툼하다고 해서 겁먹지는 마세요. 저자가 강의한 내용을 책으로 옮긴 것이라, 이해하기 쉽고 읽기 쉽게 구어체로 되어있습니다. 책의 구성을 크게 보면, 1부 위대한 지도자의 조건, 2부 세종식 인재경영과 지식경영, 3부 세종의 비전 경영, 4부 어록으로 보는 세종 리더쉽 등으로 이뤄져있습니다. 내용도 아주 듬직하고, 튼실합니다. 전 매우 흡족해하며 읽었답니다. 아직 안 읽어보신 분들껜 강추합니다. ^^

 

 


세종처럼

저자
박현모 지음
출판사
미다스북스 | 2008-01-25 출간
카테고리
자기계발
책소개
오천년 우리 역사의 전성기를 연 '세종대왕'의 소통과 헌신의 리...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

 

세종대왕은 세계사에서도 유례없는 인본주의적인 왕이었습니다. 세종대왕은 왕이란 "백성들이 하려는 일을 혼란스럽게 하지 않으려고 임금을 세워서 다스리게 했다"(세종실록 13년 06월 20일)며,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국왕 홀로 존귀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 세운 것이 왕이니 백성들이 나라 일을 근심하지 않고 자기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국왕이 나라 일을 대신 평안하게 해주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말씀은 세종실록에 다음과 같이 표현됩니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해야만 나라가 평안하게 된다...근심하고 탄식하는 소리가 영구히 끊어져서 각기 생생하는 즐거움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다"(세종실록 5년 7월 3일)

 

약간 과도한 해석일 수 있지만, 이 말씀 어딘가 비슷한 내용이 떠오르지 않나요? 전 대한민국 헌법 제1조 2항이 떠오르더군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조항이요.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혁신적인 사상 아닌가요?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헌법 조항이 과연 맞는 말인지 의심스러운 요즘 시대에, 매우 전제적인 정권으로 오해받고 있는 조선 시대에 그것도 초기 왕이 저런 생각을 갖고 있었다는 게 말이죠. 

 

세종께서는 천시받고 괄시받는 약자들의 삶에 무한 애정을 보이십니다. "지금 관리들이 아전이나 백성들의 조그만 과실 때문에 문득 등에 매질을 하고 있다. 그때문에 죽는 자가 흔히 있으니, 금후로는 일절 엄금하라!"(세종실록 2년 11월 5일)

 

억울하게 옥에 갇혀 고생하거나 죄없이 죽어가는 백성들을 특히 가슴아파하면서, 백성에게 누명을 씌운 관리는 엄벌하되, 왕 당신을 험담한 백성에게는 관용을 베풀기도 했습니다. 한때 노무현 대통령 씹기가 전 국민운동으로 번져있을 당시, 대통령께서 국민에게는 대통령을 욕할 자유가 있다고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쥐 그림만 그려도 구속하려고 혈안이 되어있는 누구와는 그릇이 다른 분이셨죠. 암튼 세종께서도 당신을 험담하는 것은 용서해주셨지만, 백성을 억울하게 죽이는 관원들에 대해선 가차 없으셨습니다. 또 죄수 중에 누군가 죽었다고 하면, "형벌이 적당하지 못했던가, 보석을 때맞추지 못하여 죽게 되었는가. 나는 지금 매우 불쌍하게 여긴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말로만 그치지 않습니다. 세종께서는 형량을 죄의 경중에 맞게 하고, 고문을 금지합니다. 또 구속된 뒤에 죄수들이 한여름동안 갇혀있으면 너무 고생이 심하다며, 재판을 신속하게 진행하도록 했습니다. 가벼운 죄를 저지른 죄수는 보석으로 내보내기도 했습니다.

 

 "옥이라는 것은 죄있는 자를 징계하자는 것이요, 본의가 사람을 죽게 하자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당신의 지론이었습니다. 옥을 맡은 관원이 마음을 쓰지 않아 더위에 질병에 걸려죽게 하고, 추위에 얼려 죽게 하거나 고문으로 비명횡사하게 하는 등의 일에 대해 "진실로 가련하고 민망한 일"이라며 가슴아파했습니다. 질병 있는 죄수들에게는 약을 주어 구호하게 하고, 옥바라지할 사람이 없는 죄수에게는 관에서 옷과 먹을 것을 주어 구호하게 하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나이가 너무 어린 자들은 뒤에 허물을 고칠 수 있고, 늙은이는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똑같이 처벌하는 것은 옳지 않다며, "나이가 70세 이상인 자와 15세 이하인 자에게는 자자하지 말라"고 명하기도 하셨습니다.

 

이는 노비들이라고 다르지 않았습니다.

 

 "임금의 직책은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것이다...진실로 차별없이 만물을 다스려야 할 임금이 어찌 양민과 천인을 구별해서 다스릴 수 있겠는가"(세종실록 09년 8월 29일)

 

"임금된 자라도 한 사람의 죄없는 자를 죽여서 선한 것을 복주고 지나친 것을 화주는 하늘의 법칙을 오히려 함부로 하지 못하는 것이다. 더욱이 노비는 비록 천민이나 하늘이 낸 백성이 아닌 이가 없으니...그 어찌 제멋대로 형벌을 행하여 무고한 사람을 함부로 죽일 수 있단 말인가?"(세종실록 26년 7월 24일)

 

노비도 하늘이 낸 백성이라는 인식은 곧 노비 출산 휴가제도 등 획기적인 복지 제도로 나타납니다. 산후 휴가 기간을 100일로 늘일 것, 산전 1개월 전부터 산모에게 일을 시키지 말 것, 남편 노비에게도 한 달간의 출산휴가를 줄 것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현대인들이 듣기에도 귀가 확 뜨이는 조처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런 사례들만 보더라도, 세종대왕께서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라고 말씀하신 게 그저 지나가는 말이 아니라, 굳건한 통치철학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불현듯 17세기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짐이 곧 국가"라고 했다는 말이 떠오릅니다. 꼭 맞는 비교대상은 아니지만, 어쩐지 그보다 2세기나 먼저 태어나 살다가신 우리 왕께서 민주주의에 가까운 통치철학을 갖고 있었노라 우쭐대고 싶어집니다. ^^;;

 

 

밥은 백성의 하늘이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요, 밥은 백성의 하늘이다...해마다 흉년이 들어 환과고독과 궁핍한 자가 먼저 그 고통을 받으며, 떳떳한 산업을 지닌 백성까지도 역시 굶주림을 면치 못하니, 너무도 가련하고 민망하다...슬프다, 한 많은 백성들이 굶어죽게 된 형상은 부덕한 나로서 두루 다 알 수 없으니, 감사나 수령으로 무릇 백성과 가까운 관원은 나의 지극한 뜻을 받들어 밤낮으로 게을리하지 말고...외딴 촌락에까지도 친히 다니며 두루 살피어 힘껏 구제하도록 하라."(세종실록 01년 2월 12일)

 

세종대왕이 즉위하기 전부터 그리고 이후 치세 기간 동안에도 내내 기근이 이어졌습니다. 그때마다 세종께서는 매우 가슴 아파하며, 관리들에게 기민구제에 힘쓸 것을 강조합니다. 누구처럼 말로만 하는 게 아니라, 농사직설을 만들어 각도에 반포해 농민들을 깨우쳐서 생산량을 늘리고, 당신이 직접 새로운 종자를 실험적으로 농사지어보고, 수령들에게도 농사를 권장하기도 합니다. 대규모 북방사민과 개간척 사업으로 농업생산량을 확대하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토지 1결당 쌀 생산량이 최고 4배까지 증대되는 성과를 얻기도 합니다.

 

그리고 왕가에서 솔선수범해 세자와 왕자들에게 배당된 토지를 줄여 국록을 아끼고 기민 구제에 힘쓰라 명합니다. "친아들, 친손자의 과전을 감하려고 하는데...이 토전을 감하는 것이 어찌 천견에 답하고 백성의 굶주림을 구제할 수 있겠는가마는, 그러나...이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다"며 백성의 굶주림을 진실로 가슴 아파합니다. 당신 역시 궁궐 한켠에 초가집을 짓고 3년을 그곳에서 기거하며 백성들의 굶주림의 고통에 동참하기도 합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전형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초가집을 지어 기거했다는 것도 놀랍지만, 3년이나 계셨다는 사실이 전 더 놀라웠습니다. 백성들의 아픔을 진실로 동참하고자 했던 왕...우리에게는 이런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백성에게 권력을 나누다 : 문자와 시간

 

저 어렸을때만 해도, 가장 존경하는 위인이 누구냐 물어보면, 이순신 장군이나 세종대왕을 대답하곤 했습니다. 아마 지금도 별로 다를 것 같지 않은데요, 왜 존경하냐고 물어보면 아이들은 대개 "한글을 만들어주셨어요"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한글을 왜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마 대답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전 고등학교 국어책에서 훈민정음 배울 때, "나랏말싸미 듕귁에 다라 서르 사맛디 아니할새" 어쩌고 밖에 기억이 안 납니다. 한글은 분명한데 도통 무슨 소리인지, 외계어처럼 생각했었죠. 한글 창제의 목적이 뭐냐고 물어보면, "중국말이랑 달라서 어리석은 백성들이 자기 뜻을 못 펴니까 왕께서 불쌍하게 생각해 만들었다"는 정도로 대답했던 것 같습니다.

 

세종께서는 나라의 근본이 백성이라고 생각하셨는데, 나라의 근본이라는 것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도 깊은 고민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매번 일일이 "너네는 나라의 근본이다"고 가르쳐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몰라서 죄를 짓거나 도적이 창궐하거나 잘못된 재판으로 억울하게 죽어가는 등 고단한 백성들의 삶을 일일이 개선시켜 줄 수도 없었겠죠.

 

그래서 백성들의 의식 수준을 끌어올리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수준을 끌어올리려면 백성들도 문자를 알아야 합니다. 배워야 합니다. 최소한의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관리들에게 무시도 안 받고, 터무니 없는 횡포를 속절없이 당하지도 않으며, 스스로 주인 의식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쉽게 배우고 익힐 수 있는 문자를 만들고자 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시계를 만들어 백성들이 널리 볼 수 있도록 보급한 것 역시 한글창제만큼이나 획기적인 일이었습니다. 세종께서는 해시계를 만들어 혜정교와 종묘 앞에 놓아 "무지한 자로 하여금 시각을 알게"(세종실록 09년 4월 15일) 하셨다고 합니다. 이는 저자의 표현을 그대로 빌면, "권력과 돈을 가진 세력이 정보를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와 공유하겠다고 하는 강렬한 의지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고정 해시계 뿐만 아니라 물시계도 만들고, 휴대용 해시계도 만들어 보급하셨죠. 즉 양반 지배층이 독점하던 문자 권력과 시간이라는 정보를 공개해 백성들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철저히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펴신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서양에서는 공공장소에 시계가 등장한 게 15세기 후반경이었습니다. 수도사들이 자신들의 수도생활에 맞게 고안했던 것을 누군가 훔쳐 달아나면서 퍼지게 됐다고 합니다. 프랑스에서는 시민들이 시계탑을 건설해달라고 탄원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15세기 후반 수도원에서 시계가 도난당하면서 곧 도시 곳곳에 시계가 등장했다...1481년 프랑스 리옹의 시민들은 시장에게 시계탑 건설을 탄원했다..."읍내의 시계탑은 그 지역을 주도하는 상인들이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지배권을 행사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제레미 리프킨, 「유러피안 드림」, 민음사, pp.143-145

 

이것도 꼭 맞는 비교는 아니겠지만, 역시나 우리 문물이나 그 문물을 활용하고자 하는 가치 면에서도 앞서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네요. 꼭 어떤 게 우월하다 말할 순 없지만, 사람 심리라는 게 우리가 더 잘 났다는 걸 자랑하고 싶다고 해야할까요? 서양 문명에 대한 열등감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 그저 우리 선조들이 얼마나 백성을 위한 정치를 했는지 더 부각시키고 싶은 마음에 이런 비교를 해보았습니다.

 

음...지금까지 소개한 것 외에도 우리가 지금 시대에 배워야할 소중한 가치들과 업적들이 무궁무진하게 많습니다. 세종대왕의 인본주의 정치 철학은 때때로 매우 선진적이어서 아직도 우리가 못 따라가는 부분들이 많습니다.

 

제게 존경하는 분이 누구냐 물어보면, 두말 않고 "세종대왕입니다"라고 대답하는 이유입니다. 알면 알수록 저절로 감복하게 되는 힘이 세종대왕께 있기 때문입니다. 율곡 이이께서도 "세종께서 국가를 안정시켜...후손에게 잘 살 수 있는 길을 터놓았으며, 우리나라 만년 운의 기틀을 다져놓았다"(율곡전서, 동호문답)고 하셨듯이, 세종대왕의 정치철학과 국정운영방식, 인본주의 정신은 시대를 초월해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물론 세종대왕께 인간적인 결점이나 허물이 없을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결점마저 없었다면, 이분이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만큼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군(聖君)'이라는 칭호가 결코 무색하지 않은 분이라 생각합니다. 

 

 

마치며...

 

세종대왕의 치적에는 반드시 훌륭한 재상들과 명민한 신하들을 같이 살펴보아야 합니다만, 너무 길어질 것 같아 생략했습니다. 이 부분은 꼭 책을 참조하시면 좋겠습니다. 암튼 세종대왕님은 침이 마르도록 칭송해도 모자랄 지경이라, 글이 너무 길어지고 말았군요. 무한애정하는 분이라 그렇습니다. 이해 부탁드립니다.

 

제가 어제 영릉에 참배하면서 세종대왕 같으신 분을 다시 우리에게 보내주십사 했던 게 왜 너무 큰 욕심이라고 했는지, 좀 공감을 하셨는지 모르겠네요. 이런 완벽한 지도자를 보내달라는 건 확실히 큰 욕심이겠지요. 이 분의 1/100이라도 따라가려는 지도자가 있으면 좋겠다는 게 제 솔직한 심정입니다. 이제 시대가 바뀌어 세종대왕께서 그토록 바라셨듯이, 한글 덕분에 누구나 쉽게 공부하고 배울 수 있고, 게다가 IT체계에 적응도가 빨라 시민들의 의식수준이 높아지고, 시민의식도 날로 깨어나고 있습니다. 나라의 근본이 백성이라고 하셨던 세종대왕의 가르침을 받들어, 이제 이 나라의 주권자가 누구인지 우리 스스로 똑똑히 보여줄 차례입니다. 말로만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이라고 하며 제 기득권 챙기기에 혈안이 되어있는 이 시대 잘못된 지도자들에게 경종을 울려야 한다고, 이 연사 강력히 외/칩/니/다. ^^

 

다음 일화는 본문 내용과 상관 없지만, 세종대왕의 재치있는 언변과 명석한 외교술을 엿볼 수 있어 소개하려고 합니다. 내용이 매우 길어지므로, 더보실 분들은 더보기를 눌러주세요. 전 읽고 빵 터져 혼자 데굴데굴 웃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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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재위 12년에 명나라 사신 창성이 황제의 말을 들어 "조선에서 말안장은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조선은 해외의 소국이니 폐해를 끼치지 말라"고 했다면서, 자신들의 행장에 파손된 물건이 있음을 완곡하게 말합니다. 아마 말안장인 듯... "우리가 비록 소국이나 말안장 따위가 없겠습니까?"라는 말을 끌어내려 한 것입니다. 그러나 세종은 "우리나라가 비록 작으나 어찌 줄만한 물건이 없으리오. 다만 칙서의 유시가 매우 엄중하여 감히 이를 어기지 못하는 것이오."라고 하여 창성의 뜻과 다른 방향으로 대답을 했습니다. 창성이 말한 '황제'의 권위를 들어 그의 말을 막아버린 것입니다. 그러자 "창성이 낯빛을 변하면서 말하지 못했다."고 합니다.(세종실록 02년 7월 27일)

 

박현모, 「세종처럼」, 미다스북스, pp.53

 

 

세종은 논쟁 중에 자신이 궁지에 몰리면 전혀 엉뚱한 논리를 내세우기도 했습니다. 재위 31년에 내불당 논쟁이 벌어졌을 때의 세종의 태도가 그것입니다. 그는 정인지, 하연 등 대신들이 모두 불당건립을 반대하자 "경들이 처음에 궁내는 불가하다 하기에, 내가 이미 그 말을 따라서 성밖에 세우도록 허락하였는데, 지금 또 성밖을 불가하다고 하니, 정히 세 살 먹은 작은 아이를 달래는 것과 같다"라면서 신하들의 포격으로부터 벗어나려 했습니다. 이에 정인지는 그동안 쌓은 임금의 덕을 생각해서라도 불당건립을 중단하는 게 좋게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세종은 "경들이 불도를 나쁘다고 하여 말을 합하여 간하니, 내가 심히 아름답게 여긴다. 만일 어진 임금이라면 반드시 경들의 말을 따르겠지만, 나는 부덕하니까 따를 수 없다."고 대응했습니다.(세종실록 30년 7월 19일)

 

박현모, 「세종처럼」, 미다스북스, pp.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