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 이야기

[책리뷰] 정조대왕이 꿈꾼 새로운 조선, 나도 꿈꾸게 되다

차라의 숲 2010. 12. 7. 21:21

"지진이 일어났다. 초저녁 천둥과 번개가 치고 우박이 내렸다. 그때 왕손(王孫)이 탄생하였다." 1752년 9월 22일의 일이었습니다. 음력 9월 말이니까 가을이 저물고 겨울이 오던때 그랬을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평범한 날씨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사방이 캄캄해지고, 하늘이 으르렁거리며 요란하던 이 날, 지진까지 일어났다고 하니 다들 겁먹기 딱 좋은 날씨였던 것 같습니다. 이런 악조건의 날씨를 뚫고 한 사내아이가 탄생합니다. 바로 이산, 정조대왕입니다.

 

정조대왕에 대한 얘기는 드라마, 소설, 영화 등 여러 대중매체에서 다양한 각도로 꾸준히 생산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역사책으로도 많이 나와있지만 최근에는 경영서에서도 정조대왕의 리더쉽을 조명하고 있더군요. 제가 오늘 소개해드릴 책도 제목이 「CEO, 정조에게 경영을 묻다」(김용관, 2010)입니다. 정조대왕이 태어나던 날의 장면은 이 책 첫 장에 소개된 내용입니다. 전문적인 역사서가 아니라 그런지 술술 잘 읽힙니다. 정조대왕의 통치철학을 심도있게 살펴보고 싶은 분들에겐 비추, 정조대왕의 삶을 개략적으로 그러나 재미있게 살펴보고 싶은 분들께는 추천해드립니다.

 

 


CEO 정조에게 경영을 묻다

저자
김용관 지음
출판사
오늘의책 | 2010-03-10 출간
카테고리
경제/경영
책소개
분노와 콤플렉스를 승화시킨 카리스마 넘치는 정조의 정치와 경영!...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이 책은 정조대왕의 리더쉽이 어떻게 형성됐고, 어떤 방식으로 펼쳐졌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주목하는 것은, 그 분이 꿈꾸었고 만들고 싶었던 새로운 조선이 과연 어떤 세상이었는 가에 관한 것입니다. 

 

정적들의 결사반대를 물리치고 수도를 수원으로 옮기면서까지 만들고 싶었던 그의 꿈, 새로운 조선...어떤 것이었을까요?

 

 

빈민 없는 세상 : 정전법

 

1776년 3월 10일, 정조가 즉위합니다. 1778년 6월 4일, 영조대왕의 3년상이 끝난 뒤, 드디어 국정운영에 대해 첫 포고문을 발표합니다.

 

"과인이 집권한 것이 이제 3년, 깊은 못의 얼음을 밟듯 하고 있다. 선왕의 부묘도 끝나 곤룡포를 다시 입고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겠다. 무릇 서경에 보면, '사람들이 부유하면 바야흐로 착해진다'는 말을 가슴에 새기고 있다. 우선 중국의 고사에도 나와있는 것처럼 '정전'만큼 유효한 토지제도는 없다고 생각한다."

김용관(2010), 「CEO, 정조에게 경영을 묻다」, 오늘의 책, pp.109

 

온갖 살해위협과 정적들의 살벌한 도전들을 뚫고 즉위한 뒤 3년이 지났으나, 정조대왕은 여전히 '깊은 못의 얼음을 밟듯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아슬아슬한 살얼음판 위에 있는 심경이 비칩니다. 그러나 선왕의 3년상이 끝났으니,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곤룡포를 다시 입고,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겠다"고 천명합니다. 요즘 식으로 하면 신발 끈 다시 질끈 동여매고 결의를 다지는 표현같은데요, 정조께서 파악한 시대의 요구란 무엇일까요? '사람들이 부유하면 착해진다'는 서경의 말을 인용했듯이, 정조께서는 가난한 백성들의 아우성을 가슴깊이 들으셨던 모양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양극화 현상이 매우 심할 때였다고 해요.

 

이땐 상업이 발달해가는 시기이긴 했지만, 조선은 여전히 농업 중심의 나라였지요. 토지제도가 부의 분배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건 당연지사였겠죠. 1778년 7월 20일, 사헌부 정언 윤면동은 "권력을 쥔 자들이 탐욕을 부리고 있습니다...돈을 가진 부자들이 각 지방의 도로들을 점유하고 갑자기 값을 올려 팔고 다시 사고팔고 해서 재산이 적은 사람들은 토지를 가질 수 없습니다...땅은 농사를 짓는 농민들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소수의 특권 부자들이 땅을 다 소유하고, 그 땅에 과도한 세금을 물리고 있으니 백성들이 살 길은 막막합니다. 이런 암담한 현실에 하늘이 전하와 같은 성인을 내려 개혁을 이루라고 독려하고 있습니다"라는 내용으로 상소를 올립니다. 

 

이때는 한양 집값도 폭등해서 돈 있는 자들은 집을 몇 채나 갖고 있어도 드러나지 않아 세금을 물릴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가진 자들의 탐욕과 횡포는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윤면동에 따르면 조선의 전체 논과 밭은 약 114만 결인데, 그 중 농사를 짓지 않은 땅이 55만 결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땅을 농민들에게 주어 농사를 짓게 하면,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할 수 있고, 나라도 부강해질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부자들이 세금을 안 내려고 토지대장에 땅을 올리지 않고 묵혀두기 때문에 정작 농사를 짓고 싶은 농민들이 농사를 못 짓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토지로 인한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고자, 정조대왕은 정전법을 내놓은 것입니다. 정전법에 대해선 더보기를 눌러주세요. (조선시대 토지제도와 조세제도에 대해 제가 아는 게 별로 없네요)

 

더보기
중국 고대 사상맹자()가 설()한 것이 가장 오래 된 것이다. 1리 4방(1리는 400 m)의 토지를 ‘정()’자 모양으로 9등분하여, 주위의 8구획은 8호()의 집에서 각기 사전()으로서 경작하고, 중심의 1구획은 공전()으로서 8호가 공동으로 경작하여 정부에 바치는 조세로 할당하였다. 또한 맹자는 인의정치()에 입각하여 이 경지 외에도 택지를 백성에게 재산으로 주어 애국심을 함양하도록 하였다. 정전법의 내용은 《주례()》 등 유가()의 문헌에서는 더욱 복잡해지는데, 그것은 소농민을 기본으로 한 유가적 정치사상의 소산이었다. 


그러나 주창한지 얼마 되지 않아 기득권 세력의 집요한 반발이 이어졌음은 물론입니다. 윤면동의 상소를 국정에 적극 반영하라는 정조대왕의 명령에도 기득권 세력은 꼼짝하지 않습니다. 당시 영의정 김상철은 개혁에는 언제나 시기가 있다며, 급격한 변화를 원치 않는다고 얘기해 정조의 분노를 사기도 합니다. 개혁의 끈을 당기기 위해 정조는 그를 해임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반발은 시작이었을 뿐입니다. 이후 집권 기간 24년 내내 숱한 개혁정책을 두고 신하들과 줄다리기가 계속됩니다.

 

  

누구나 장사할 수 있는 세상 :  신해통공(금난전권 폐지) 상업중심도시 개발

 

 1784년 3월 20일, 정조는 창덕궁 선정문 넓은 마당에 일반 백성들과 종로 상인들을 대거 초청했습니다. 단 육의전 상인들은 배제됐는데요, 오늘날로 치면 재벌급은 배제하고 재래시장 상인들만 불렀던 거죠. 이들을 왜 모았을까요? 일종의 시민과의 대화를 하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일반 백성들은 흉년으로 힘드니 구휼에 힘써달라고 건의했고, 정조께서는  근본 대책을 강구하되,"나라의 창고 내탕고를 다 개방해서 흉년든 농민들을 구제하라"고 지시합니다. 영세상인들과는 경제개혁 토론을 벌였습니다.

 

영세상인들은 부유한 상인들이 시장을 독점하니 상점을 내고 싶어도 자리를 구할 수가 없다며 하소연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이 말 참 많이 쓰게 되는데, 그때도 재벌급들이 다 쓸어가는 통에 영세상인들은 불법 시장인 난전이 아니면 장사를 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이때 정조께서는 소상공인의 창업을 위해 나랏돈 10만 냥을 대출해줄 것, 세금을 절반으로 줄여줄 것, 대출금은 이자를 없애고, 은으로 환전해서 받으면 수수료를 내야 하므로 은으로 받지 말 것 등을 지시합니다.

 

"대체로 공인과 소상공인 모두 우리 백성들이다. 그런데 돈이 위에서만 돌고 아래로 돌지 않으니 임금의 뜻이 밑으로 전파되지 않고 있었다....소매가 길어야 춤을 잘 추고, 돈이 많아야 백성들이 장사를 잘 할 수 있다. 먹고사는 문제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신역, 공미, 공포와 여염세, 선세, 둔세를 우선 절반까지 줄여 걷어라. 백성들의 형편을 헤아려서 공화를 대출해주어 조치토록 하라...분명히 이번 나라에서 하는 대출은 이자를 없애고 대여해주라 전했다. 돈을 갚는 기한을 1년으로 정했다. 문제는 또 돈을 은으로 바꿔주면서 그것에서 수수료 명목을 챙기는 자들이 있어 이것도 문제다. 돈을 직접 소상공인에게 지급하고, 돌려받을 때도 은으로 환전하지 말게 하라. 서민들은 환전하면서 또 얼마의 돈을 수수료로 빼앗기니 그들 고통을 누가 알 것인가?"

 

김용관(2010), 「CEO, 정조에게 경영을 묻다」, 오늘의 책, pp.134-135

 

훗날 체제공이 주도했던 '신해통공'(1791년)은 여기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정조께서는 국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 뒤 적임자를 발굴해 개혁정책이 이뤄질 때까지 꾸준히 밀고 간 것입니다. 이 책의 저자는 "조선 개국 이후 기득권의 이익을 과감하게 무너뜨린, 400년만의 경제혁명"이라고 정의내릴 정도로, 신해통공은 조선 역사에서도 일대 혁신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물론 1793년 3월 10일에는 육의전 상인 대표 70여명이 수원까지 내려가 항의 시위를 벌이는 등 저항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소수 부자들의 독점적 지위를 해체하고, 누구나에게 공정한 기회를 준 것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도 실시하기 어려운 개혁정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였겠죠? 신해통공 정책은 정조대왕이 돌아가신 뒤 2개월도 안 돼 폐지되는 비극적 결말을 맞게 됩니다. 정순왕후를 필두로 한 노론세력이 무엇을 가장 눈엣가시로 여겼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역대 어느 왕도 선왕의 정책을 3년 안에 수정하는 법이 없었다는데, 그마저 무시했으니 그때나 지금이나...또 이 말을 씁니다만, 경제민주화에 가장 큰 저항세력은 역시 기득권 세력임을 잘 알 수 있습니다. 틈만 나면 불리하다 싶은 정책을 아무 망설임없이 재까닥 뒤집어버리는 것, 그들의 장기이자 대단한 힘이기도 하지요. 개혁정책이 오래 가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신분 차별 없는 세상 : 서얼 등용

 

정조께서는 백성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경제정책이 자꾸 반발에 부딪히고 세월이 지날수록 개혁의 동력이 떨어지자, 그 문제의 원인과 해법을 인재양성과 충원에서 찾으려고 했습니다. 인재가 한정된 지역과 가문에서 배출되니 새 바람이 불지 않는다고 생각하신 겁니다. 인재수급에 대한 생각은 아마 집권 전부터 갖고 계셨던 듯, 정전법을 선포하기 바로 전해인 1777년에는 의미있는 선언을 하셨죠.

 

 "조선은 앞으로 서얼들도 정치 참여의 길을 트겠다. 공자를 섬기는 나라로 서얼이란 이유로 차별하는 나라는 조선 뿐이다"라는 말씀과 함께. 개혁을 하고자 해도, 서울경기지역 문벌가 위주의 인물들만 데리고는 추진이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인력에 새 바람을 일으키기 위해서, 규장각 각신들을 지방에 보내 직접 시험을 치러 성균관에 입학시키기도 하셨습니다. 교육혜택을 골고루 주어야 좋은 인재를 선발할 수 있다는 신념이셨겠지요. 그러나 서얼 출신들이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게 되었지만, 차별은 여전했던 것 같습니다. 1784년 4월 16일, 성균관에서 유생들과 식사를 함께 하신 적이 있는데, 서얼 출신 유생들은 양반 유생들이 식사하고 난 뒤 맨 나중에 식사하도록 하고, 줄도 따로 서게 하는 모습을 보셨던 모양입니다. 당장 그 날로 성균관 대사성(대학 총장)을 파직시키고, 다시는 서얼들을 차별하지 말 것을 엄명하셨습니다.  

 

우리가 익히 잘 아는 유득공, 이덕무, 서이수, 박제가 등이 바로 서얼 출신으로 규장각 초대 검서관이 되신 분들입니다. 검서관이라는 게 문서를 교정하거나 기록하는 등 규장각 각신들을 보좌하는 잡직의 일종이긴 했지만, 정조 대왕은 이들에게 왕과 신하 사이에 논의 내용을 기록하게 하며, 이들의 역할을 중요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아! 종은 절로 울리지 않고, 두드리면 울리는 법이다. 지금 신하들은 초야에 묻힌 선비들을 찾아 천거하라. 내 반드시 예로 조치할 것이다" 이렇듯 인재에 대한 정조대왕의 목마름은 서얼 차별을 폐지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1781년에는 문무차별을 없애 무인들 가운데 실력이 우수한 자는 귀천을 가리지 말고 발탁하라는 지시를 내립니다. 인재 수혈에 차별을 두지 말라는 정조대왕의 굳은 신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인권이 지켜지는 세상 : 흠휼천칙 (인권법) 제정

 

1778년 1월 12일에는 '흠휼전칙'이라는 법률안을 제정하셨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인권법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정확한 법적 근거에 따라 형량을 매기도록 한 것인데, 매를 맞는 회수와 매의 치수까지 기록하고, 이를 준수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정조 14년, 그러니까 1780년 함경남도 암행어사 서영보는 다음과 같이 보고합니다.

 

"《흠휼전칙》은 우리 성상께서 즉위하신 처음에 제정한 법입니다. 모든 신하들이 만약 이를 고이 받들어 수행하지 않는다면 그 죄는 중한 것입니다. 이성(利城) 고을에서 환자곡을 분배하던 날 이른바 대동미 감관(大同米監官)이란 자가 환자곡을 받으러 온 백성들 중 대동미를 바치지 않은 자를 잡아놓고 엄하게 곤장을 치면서 바치라고 독촉하였습니다. 비록 수령이라 하더라도 군무(軍務)가 아니면 곤장을 쓸 수 없는 법인데, 하찮은 향소임이 제멋대로 곤장을 쓰는 것은 규정을 크게 위반한 것입니다. 해당 고을 수령은 그들을 능히 단속하지 못한 죄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수령이라고 해도 군법을 위반한 것이 아니면 곤장을 쓸 수 없는데, 대동미를 바치지 않았다고 곤장을 친 것은 명백히 위법임을 알 수 있습니다. 흠휼전칙이 있었어도 이 모양이었는데, 이마저 없었다면 억울하게 매맞고 죽어간 백성들의 수는 더 헤아릴 수 없이 많았을 겁니다.  백성들의 부당한 처벌을 피하는데, 흠휼전칙이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노비 없는 세상: 공사노비 해방

 

정조대왕은 공노비 해방도 집권 내내 줄기차게 주장합니다. 공자가 살던 시대에도 공자는 노비 없는 세상, 평등한 세상을 외쳤다며, 신분상 노비제도를 그만 거둘 때가 됐다고 신하들을 설득했었죠. 정조께서 주장하신 노비 해방은 사후 1년 정순왕후의 수렴청정기간에 비로소 부분적으로나마 이뤄집니다. 정순왕후와 심환지로 대표되는 노론세력이 정조대왕의 모든 개혁 정치를 거꾸로 돌렸지만, 유일하게 승계한 것이 바로 공노비 해방이었습니다. 1801년 1월 28일, 당시 영의정 심환지는 많은 대소신료를 돈화문 앞에 모이게 하고, 조선 각 관청에서 갖고 있던 1209권의 노비 명단을 모두 불태우는 정치 쇼를 벌입니다. 쇼이긴 했지만, 왕실이 관리하던 내수사 노비 3만 6,974명의 노비와 관청 노비 2만 9,903명의 노비가 해방의 기쁨을 누렸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양반 기득권 세력의 저항으로 사노비는 해방되지 못합니다. 사노비 해방은, 정조를 가장 존경했던 것으로 알려진 고종대에 이르러 1886년 1월 2일, 공노비 해방 85년만에 개인노비의 세습 철폐 조치가 내려집니다. 조선 시대 노비 제도가 막을 내린 순간이기도 합니다. 링컨의 노예해방선언이 1863년 1월에 나왔다고 하니, 공노비 해방으로만 보면 조선이 62년이나 앞서있었던 셈이네요.  

 

 

마치며...

 

가난한 사람이 없는 세상,

누구나 자유롭게 장사하고 농사를 지어 정당한 소득을 가질 수 있는 세상,

서얼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는 세상,

죄인들도 법에 근거해 적정한 처벌을 받을 수 있는, 그렇게 인간의 존엄성이 지켜지는 세상,

인간으로 태어나 정당한 권리를 누릴 수 있어야 하는, 그래서 노비가 될 필요도 없고, 노비가 있을 필요도 없는, 그런 노비 없는 세상...

 

바로 정조대왕이 꿈꾸었고, 수원으로 천도를 하면서까지 이루고 싶었던 새로운 조선이었습니다. 저는 정조대왕 사후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돌아가는 실태를 보며, 자꾸만 지금 이 시대가 겹쳐보였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이 말은 이 책을 읽는 내내, 제 입안에 맴돌던 말이었습니다. 역사는 진보한다고 하던데, 뭐가 좋아졌는지보다, 뭐가 안되고 있는지만 봐서 그런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때나 지금이나...

 

그래서일까요? 정조대왕의 꿈을 박제로 만들고 싶지 않아졌습니다. 정조대왕이 그렇게 일찍 돌아가시지만 않았더라면...하고 안타까워 하기보다, 그 때 이루고자 했지만 미완으로 남아있는 그 꿈을 지금이라도 우리 시대에 이뤄야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만큼 소중하고 가치있는 꿈이기 때문입니다. 시대가 변하고 제도가 바뀌었어도 여전히 그 꿈이 대단히 의미있기 때문입니다.

 

정조대왕이 꾸었던 그 꿈을 여러분들도, 같이 꾸지 않으시렵니까?

 

마지막으로, 정조께서 승하하기 27일 전 1800년 6월 1일, 수원 유수 서유린에게 들려주셨던 말씀을 여러분과 나누고 마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 내가 수원 화성을 보는 것은 중국 주나라 수도를 보는 것과 같다. 지금은 모래 먼지만 부옇게 날리고 있지만 앞으로 10년 동안 세금을 면제해줄 터이니, 아침에 밭을 갈고 저녁이면 추수하는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인가?"

 

김용관(2010), 「CEO, 정조에게 경영을 묻다」, 오늘의 책, pp.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