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한 원로 정치인에게서 연평도 사건과 현 정국에 대한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비공개 세미나였기 때문에, 실명을 밝히지 못하는 점 먼저 사과드립니다.
그 분은 이번 연평도 사건이 이명박 정부에게 득보다는 실을 많이 가져다 주었다고 진단하셨습니다. 득이라면, 대포폰, 4대강문제, 한미FTA재협상 등 모든 이슈들을 일시에 잠재웠다는 것이고, 실이라면, 현 정부가 위기관리 능력이 없다는 게 만천하에 드러난 점이라고 했습니다. 국가를 지키는 능력, 즉 주권수호능력이 없다는 게 증명됐다는 것이죠. 아무리 후한 점수를 주려고 해도, 점수가 안나오는 아예 마이너스 저 밑바닥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진보의 우려가 아니라, 보수계에서 터져나온 탄식이라고도 했습니다.
이명박 정부의 또 하나 큰 손실은 바로 '개헌론'까지 날아가 버린 것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압박 이슈가 사라진 것은 득이지만, 동시에 개헌론까지 묻혀버린 것은 실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대통령을 해보니 권력이 너무 대통령에게 집중돼 있더라. 지금은 대통령이 온갖 사안에 대해 다 결정하게 돼 있다.” (2MB, 2010.10 어느 날 여권 핵심인사에게 한 말)
이 말인 즉슨, 권력집중의 폐단이 있으니 권력을 분산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 즉 개헌을 논의하라는 언질이었습니다. MB는 "개헌을 하려면 앞으로 1년 안에 해야 한다"(2009.11.05)고 하거나, "...선거구제와 행정구역 개편을 하루빨리 논의하는 한편, 필요하다면 개헌도 국회에서 논의할 수 있을 것"(2010.08.15경축사)이라고 하는 등 시시때때로 개헌론의 군불을 지펴왔습니다. 한나라당에서는 대통령의 의지를 받아, 국회 개헌특위 구성을 포함한 4개 요구안을 민주당에 제안했고, 민주당이 요구한 국회 4대강검증특위 구성 등 4개안을 받아들이겠다며, 민주당과 빅딜 가능성을 시사하며, 개헌론에 강한 의지를 내비쳤습니다.
모 보수언론에서는 후반기 국정운영의 핵심 화두가 '개헌'이 될 것이라고 단언하며, 개헌론의 군불에 동참할 뜻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공교롭게도 이번 연평도 포격 사건은 연말까지 개헌론을 공론화하려고 했던 MB정부와 보수언론을 위시한 보수세력을 완전히 물먹여 버린 것입니다. 김정일에게 공격당한 것도 분하지만, 그들에겐 이것도 정말 열받는 일일 것 같습니다.
개헌 논의의 역사에 대해 제가 무지하기 때문에, 세세하게 설명드릴 수는 없겠네요. 만약 개헌론에 대한 진보와 보수 쟁점 사항이 궁금하시면, 더보기를 눌러주세요.
개헌의 핵심 쟁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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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아젠다넷, http://j.mp/hxvtMB >
원로 정치인께서는 개헌론의 핵심이 바로 평등 헌법 조항을 완전히 삭제하는 것이라고 보시더군요. 평등 헌법 조항이 뭘까요? 네 바로, 헌법 제 119조 2항, 일명 '김종인 조항'을 일컫는 것입니다.
"국가는 균형있는 국민 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 하며 경제 주체가 조화를 통한 경제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대한민국 헌법 제 119조 2항
■ 균형있는 국민 경제 성장, ■ 안정과 적정한 소득 분배, ■ 시장 지배와 경제권력 남용 방지를 주요 골자로 하는 이른바 '경제민주화 조항'이 그것입니다.
전 이 조항을 처음 접했을 때, 저도 모르게 감동에 북받쳐 눈물을 흘렸습니다. 우리에게 이토록 훌륭한 헌법 조항이 있었다니 놀랍고 감탄스러울 뿐이었습니다.
저에겐 매우 감동적인 이 조항이, 보수세력에게는 눈엣가시라고 합니다. '평등'을 얘기하면 빨갱이로 몰아가는 사람들이니까요. 노무현 대통령이 "이미 권력은 시장에 넘어갔다"고 하셨죠. 삼성을 위시한 재벌 권력이 너무 강대해져서 정부가 있는 권리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데, 이 경제민주화 조항마저 없애버려 더 활개를 치겠다니 기가 막힐 뿐입니다.
저는 일명 '김종인 조항'이 어떻게 탄생하게 됐는지, 운좋게 직접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두어 차례 있었습니다.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께서는 경제문제에 해박하신 것은 물론 현실진단과 해법이 정확하셔서 감탄하며 들었더랬습니다.
1987년 개헌을 위한 헌법특위가 구성됐고, 그 때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께서 당시 경제분과위원장이 되셨다고 합니다. 김종인 수석이 경제분과를 담당하게 됐다는 소식에 당시 전경련이 발칵 뒤집혔다고 해요. 헌법개정홍보대책위까지 구성해서 막대한 돈을 써 학자들을 여럿 불러모아 대책 마련을 위해 대대적인 세미나를 열기도 했다고 합니다. 김종인 수석이 독일 유학을 다녀오신 분이라, 독일처럼 노동자 대표와 사용자가 공동으로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의사공동결정제도'를 우리 헌법에 도입할까봐 매우 노심초사했다는 것입니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혁신조항을 만들게 될줄은 모르고요.
1970년대 중반에도 우리 경제구조를 지금 상황으로 계속 유지하면 1990년대 들어 제6차 개발이 끝나면 정부가 기업을 통제할 수 없는 상태로 간다고 지적했는데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어요. 파이가 커지면 나눠먹을 수 있는 게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 파이에 정치세력이 밀리는 것이 자본주의라고 누누이 말했거든요. (중략)
마지막에 개헌안을 만들어서 대통령께 보고하러 갔더니 그 조항을 넣어도 되겠냐고 물었어요. 그래서 "루즈벨트가 뉴딜을 할 때 사회보장을 유럽 수준으로 하려고 했는데, 미국의 의사협회와 제약업자들이 사회 의료보험은 위헌이라고 위헌소송을 해서 못했다. 우리도 이제 재벌이 힘이 커져 있는 상황에서는 재벌이 언론과 법률시장을 다 장악하게 된다. 그때가 되면 어쩌겠느냐"고 해서 넣게 된 거지요. 그 조항을 지금도 자꾸 없애자고 하는데, 그 조항 때문에 안 되는 게 뭐 있습니까? 그 조항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정부의 행동반경을 보장해주는 거잖아요.
「문제는 리더다」, pp.160-162, 메디치(2010)
"재벌이 언론과 법률시장을 다 장악하게 된다. 그때가 되면 어쩌겠느냐?"...1987년에 이미 작금의 상황을 정확히 예측하신 거였습니다. 그러면서 "자꾸 그 조항을 없애자고 하는데, 그 조항 때문에 안 되는 게 뭐가 있느냐?"며 보수세력의 주장이 터무니없다고 일갈하십니다.
지난 9월에 어떤 강연회에서 들었던 말씀 중에 가장 인상깊었던 말씀도 바로 이 문제였습니다.
"모든 국민은 법앞에 평등하다", 이것이 공정사회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불공정이 가장 많이 일어나는 데가 바로 '시장'입니다. 우리나라는 압축성장으로 여러 불균형이 야기됐습니다. 그것을 정치적으로 시정해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소득격차가 매우 심한데도, 그것에 대해 논쟁해본 적도 없습니다. 노동시장에서 임금이 결정될 때 분배도 결정됩니다. 힘 센쪽이 유리하니까, 소득격차가 벌어지기 마련입니다. 양극화가 심해지면, 사회가 불안정해집니다. 사회가 불안정해지면 경제성장도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지금 '양극화 해소'라는 절대 과제가 놓여있습니다. 그래서 정부가 적정수준에서 개입해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제119조 2항의 핵심입니다.
2010년 9월 어느 날,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 강의 중 발췌
양극화 해소라는 우리 사회의 가장 시급한 과제를 위해, 정치권에서는 제 119조 2항을 없애려고 할 것이 아니라,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정부의 적극 개입을 주장하고, 어떻게 개입할 것인지 합리적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말씀의 요지였습니다.
전 이 말씀에 깊이 공감하고 동의합니다. 원로 정치인께서 하신 말씀도 똑같았습니다. 양극화의 원인과 성격이 뭔지를 정확히 꿰뚫어볼 수 있는 정당 혹은 정치인만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고 고언하기도 하셨습니다. 물이 100도씨에 끓는다면, 지금 우리 국민의 양극화문제에 대한 불만은 70도씨까지 끓어올랐다시며, 0도에서 70도까지 끓어오르는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70도에서 100도 끓는데는 금방이라고 했습니다. 119조 2항을 삭제하라는 주장은 국민의 요구와 시대의 요구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일침하셨습니다. 그러면서 JF케네디의 다음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만약 자유 세계가 빈곤한 다수를 돕지 못한다면, 그것은 부유한 소수도 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존 F 케네디, 1961.01.20 미국 제35대 대통령 취임연설 중)
'다수의 빈곤을 구제하지 못하면 소수의 부자도 구제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시장자유주의자들의 극단적 주장은 반드시 자신들에게 부메랑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개헌 자체가 나쁜 건 아닙니다. 하지만 민주주의 기본 정신, 자유 못지않게 평등의 가치를 구현할 수 있는 방향으로 바꾸겠다고 하면 모를까, 오히려 평등을 저해하고 퇴보시키는 개헌을 결단코 용납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일부 기득권자들의 이해와 정치인들의 자기 자리 보전을 위해 왜 우리가, 그리고 민주주의가 희생되어야 하나요? 이들의 탐욕에 입각한 정치행위를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요?
원로정치인께서 우리 시민들에게 당부하는 말씀을 들려드리며 마무리하겠습니다.
권력집중이 문제라면, 권력을 분산하는 방법이 아니라, 권력을 어떻게 잘 견제할 것인가를 더 고심해야 합니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보다 탄력적인 국정운영을 위해서는 우리나라 특성상 권력분산은 맞지도 않습니다. 권력집중의 폐단들은 대부분 사법부과 국회가 견제를 잘 못해서 벌어지는 일들이지 않습니까?
권력견제가 잘 안된다면, 시민들이 나서야 합니다. "대통령과 행정부를 견제하라고 뽑았더니, 왜 못하냐?" 선거로 심판을 해야 합니다. 시민 각자 나름의 생각과 논리가 있어야 잘못된 길로 가려는 정치권력을 돌이킬 수 있습니다. 그렇게 시민들이 두눈 부릅뜨고 지켜보는 가운데, 정치권력의 날이 제대로 서야 비로소 양극화 문제의 해법을 하나둘 실현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 시민이 깨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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