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과 단상

시골장에서 웨딩장갑 사던 날

차라의 숲 2010. 10. 25. 18:39

난 장터에 나가는 걸 별로 내켜하지 않는다. 특히 도시 한 복판 어딘가에 상설적으로 세워진 시장에는...

 

말총머리를 깡총거리며 풀쩍 풀쩍 뛰어다니던 초딩시절(그땐 국민학교였다죠?), 집에 가는 길에 장이 있었다. 조용하고 텅비어있던 공터에 5일마다 한번씩 세워진 시장은 늘 북새통을 이뤘다. 그럴 땐 학교를 파하고 바로 집에 가지 못했다. 물론 매번 그랬던 건 아니다. 싫증을 잘 내는 편이었으니까.

 

 

<사진 출처: http://blog.naver.comdoldol200119407380>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가 뭔가를 사기 위해, 그것도 내 물건이 아니라, 문방용품이나 50원짜리 쭈쭈바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주려고 뭔가 값을 치렀던 경험이 바로 초딩 3학년때의 일이다. 바로 장날때였다.

 

'기억'이라는 것이 얼마나 구멍이 크게 뚫려진 망사인지, 앞뒤 다 걸러버리고 체에 남은 건 '엄마 생신선물/ 하얀 웨딩 장갑/ 국민학교 3학년/ 시장에서' 이 네 단서뿐이다.

 

엄마 생신은 12월 중순, 겨울 한 복판이니 분명 추울 때였겠지만, 그때가 꼭 겨울은 아니었던 것 같다. 정확한 날짜에 엄마를 놀래켜주려는 선물이 아니라, 우둔한 건지 좀 모자랐던 건지, 초딩 3학년이 돼서야 엄마 생일을 처음으로 챙기겠답시고 생일도 아닌데 다짜고짜 생일선물로 뭐가 받고 싶냐고 물었던 것 같다.

 

엄만 "됐다"고 빙그레 웃기만 하다가, 계속 알려달라 졸라대자, "그럼 장갑 사 줘. 하얗고 구멍이 송송 뚫려있는 아주 얇은 장갑"이라고 주문했다.

 

내 그림사전엔 그런 그림이 없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도대체 상상이 안 가는 거다. 운동회날 매스게임할 때 꼈던 흰 면장갑은 얼마든지 문방구점에서 살 수 있었지만, 무슨 장갑이 하얗기만 하면 됐지, 구멍까지 뚫렸담? 구멍 뚫린 장갑을 낀 사람은 한 번도 못 봤는데...양말 빵꾸나는 것처럼, 장갑도 빵꾸나는 건가? 나중에 실로 꿰매야 하는 건 아닐까? 그 조그만 머리로, 안 돌아가는 머리 굴리느라 생각이 복잡했다.

 

 

<그때 웨딩장갑이 이렇게 예뻤겠냐만, 관련 사진 구할 수 있는 게 이것뿐. 사진출처 주소는 까먹었다. 죄송>

 

 

그때만 해도, 시장은 내게 신기하면서도 두려운 미로였다. 엄마를 따라 시장에 나설 때면, 여기저기서 군침 돌아가는 맛난 고구마 튀김 냄새가 폴폴 날리고, 엄마의 빈약한 주머니 사정을 모르는 나는 엄마를 그리로 이끌기 일쑤였으며, 나보다 더 영리했던 엄마는 그 길목만 요리조리 잘 빠져나가셨다. 그래도 정신없이 이것저것 사러 돌아다니다보면, 한번쯤은 다시 그 앞을 지나기 마련인데, 내 간절한 눈빛을 포착한 아줌마는 다짜고짜 우리 엄마를 불러세운다.

 

"어이 아짐, 아짐~ 거기 좀 서보소. 이리 와보랑께. 애가 먹고 싶은갑구만. 지 엄마 뒤꽁무니 따라당기느라 힘들껀디 좀 사주소~"

 

'아줌마, 화이팅~',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엄만 내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시다가, 튀김을 이것저것 고르시곤 봉지에 싸서 내 품에 안겨준다. 누런 봉투에 기름이 쫙 번지고, 어느새 입언저리와 손가락이 기름에 반들반들거려도, 막 튀겨낸 뜨끈뜨끈한 튀김은 어찌나 고소하고 맛있던지...그러나 엄마는 끝내 입에 대지 않으신다.

 

'엄마는 튀김을 싫어하나 보다. 그러니까 사달래도 잘 안 사주지'

다 먹고 난 뒤 포만감에 기름기 번들대는 손으로 배두드리며 한다는 생각이 이런 거였다.

 

 

 <사진출처: http://bbinemo.com/100053769060>

 시장엔 먹거리가 많죠? 뻥튀기 좋아해요. ^^ <사진 출처: http://blog.naver.com/leekeebok/20071156635>

 

장은 무지 컸다. 그 좁은 공간에 물건 팔러 이고지고 나온 아줌마, 아저씨들이 어찌나 많은지. 좁디 좁은 통로에 물건 사라고 외치는 소리, 값을 흥정하는 사람들의 소리, 개, 닭, 소 울음소리, 사람들끼리 끊임없이 물결처럼 오가며 부딪히는 소리...그래서 장은 너무 시끄러웠다.

 

엄마 손을 꼭 잡지 않으면, 산만큼 큰 어른들에게 떠밀려 길을 잃어버리기 쉽고, 그렇게 미아가 된 아이들도 심심찮게 봤으므로, 발빠른 엄말 따라다니는 건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반토막도 안 자란 아이라, 쉽게 넘어지고 채이고, 엄마가 선 곳에서 구경할 수 있는 거라곤 이쁜 꽃신이나 앙증맞은 나비핀, 하늘거리는 원피스 진열대가 아니라, 이상하고 못생긴 게, 꼬막, 낙지 뭐 이런 것들 뿐이었다. 그것들의 잔 꿈틀거림은 어찌나 징그럽던지...또 흥정할 때의 엄마 목소리는 얼마나 크고 악착같던지...깎고 또 깎고..도대체 얼마나 더 깎아야 직성이 풀릴지 엄마는 무척 완고했었다. 죽는 소리 하며, 더 이상 깎아줄 수 없다고 버티는 아줌마들의 노련함까지는 아직 간파하지 못했던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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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때 읍내 애들 엄마들은 아무 말 없이 돈만 줄거야. 우리 엄마처럼 싸울 것처럼 악쓰진 않을거야' 하며, 챙피해하기도 했다. 우리집이 가난하다는 걸 인식하지 못했다. 그렇게 시장은 내게 썩 유쾌하지만은 않은 곳이었고, 길을 잃어버리면 집도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공포를 안겨주는 곳이었다. 그런 그곳에 드디어 혼자 가게 된 것이다. 그 구멍이 송송 뚫렸다는 괴상한 장갑을 사러...

 

여기저기 기웃거려도 도대체 어디서 파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튀김파는 아줌마네도 용감하게 지나치고, 징그런 해산물 파는데는 얼씬도 안하고, 평소 오랫동안 구경하고 싶었던 옷파는 진열대 앞에서는 곁눈질로 서성대다가 재빨리 자리를 떴다. 아저씨가 사라고 하면 안 되니까. 옷 살 돈은 없었으니까.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벙어리장갑 진열대 앞에서 결국 멈춰섰다.

 

말수가 적고 한껏 소심했던 나는 속으로 몇 십번도 연습한 말을 겨우 입속에서만 뱅그르르 돌리고 있었는데, 역시 장사꾼의 예리함으로 아줌마가 먼저 말을 건네신다.

 

"장갑 볼랴?"

"예"

"벙어리 장갑? 무슨 색깔로 줄까? 이것도 있고, 요기도 있다"

"저어..."

 

드디어 말을 해야할 때가 왔다. 웃음거리가 된다해도 어쩔 수 없다. 설마 엄마가 없는 걸 사달랬겠어?

 

"울 엄마 줄 건데요, 하얗고 구멍 뚫린 장갑 있어요?"

"뭐어?"

 

그럼 그렇지. 있을리가 있나. 그래도 한 번 입을 열었으니 다시 얘기해보지 뭐.

 

"얇고 하얗고 구멍이 뽕뽕 뚫렸다고.."

 

아줌마, 인상을 찌푸리시며 좀 생각하시다가 옆에서 파는 아줌마한테 물어본다.

"어이 자네, 하얗고, 구멍 뚫린 장갑이란디 들어봤능가?"

"어..거 저 뭐여. 결혼할 때 여자들 끼는 거? 면사포 쓰고 그럴 때 끼는 장갑 아닌가?"

"그래 그거 맞능갑따. 잠깐 기다려봐라잉. 어디 있을껀디.."

 

3천원이었을까? 500원이었을까? 얼마였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그러나 기분은 뛸 듯이 기뻤다.

웃음거리도 안 됐고, 정말 그런 장갑이 있었던 거다.

 

"근디 별일이다잉. 뭐한다고 이런 장갑을 사오라고 했다냐. 누가 쓴다고...내 참 별일이시..."

 

아줌마들의 호기심을 뒤로 하고, 튀김집이고 뭐고 집으로 걸어 30분 길을 10여분만에 단숨에 주파했던 기억이 새롭다. 야들야들해서 감촉이 부드러운 그 장갑은 내 손보다 훨씬 큰 엄마 손에들어가자, 놀랍게도 구멍이 아슬아슬하게 안 찢어지고 딱 맞았다. 양손을 다 낀 엄마의 손을 보니 정말 천사같았다. 밭일때문에 굳은 살 박힌 엄마의 거무스름한 손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대신 순백의 실장갑으로 덮인 아름다운 소녀의 손이 되었던 거다.

 

"엄마, 아줌마들이 이상하대. 왜 이런 장갑 낄려고 그러는지..."

 

그때 엄만 뭐라고 대답했을까? 결혼할 때의 그 수줍고 가슴 뛰었던 순간을 다시 기억하고 싶으셨던 걸까?

이제라도 여쭤봐야겠다. 벌써 20년도 훨씬 지난 얘기라 기억이나 하실지는 모르겠지만...

엄만, 그때 그 장갑을 몇 번 더 껴보시다가 잃어버렸다.

그러고보면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시장에 없는 게 없다지만, 웨딩장갑까지 있었다는 게...지금도 있을라나? ^^